오늘의풍경

Scenery of Today

함께 변화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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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풍경이 말하는 새로운 디자인은 뭐예요?

2025년 8월 25일 FDSC가 주최한 밝은미래연구소+ 토크에 오늘의풍경이 발표자로 참여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디자인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오늘의풍경의 사례를 공유하며 참여자들이 예비-사회초년생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디자인에 페미니즘을 실천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희원은 오늘의풍경 조직 문화와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실천이 어떻게 적용되어 있는지 소개했고, 영인은 그 과정 속 얻은 개인적인 경험과 배움을 구체적인 디자인 프로젝트 사례를 들어 공유했다. 이 글은 영인의 이야기를 다듬은 것이다. 

3년차 인하우스 디자이너, 오늘의풍경 인턴으로 이직하다

사회인이 된다는 건, 디자인이라는 건 다 이런 걸까? 울산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자취하며 2년 넘도록 커머스 인하우스 신입 디자이너로 일했다. 맡은 프로젝트를 잘 해내면 뿌듯하다가도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고 그린워싱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문득 내 소중한 하루하루가 너무 의미 없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번아웃과 무기력증을 겪으며 다시 울산으로,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 쉬던 중이었다. 마침, 인스타그램을 통해 오늘의풍경 인턴 모집 공고를 마주쳤다. 그 공고에서는 오늘의 풍경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오늘의풍경은 디자인이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라며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비영리/임팩트 지향 조직, 개인들과 일해왔습니다. 2015년 1인 스튜디오로 시작해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팀을 꾸려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풍경은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일하는 과정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믿으며, 함께 협업하는 파트너사는 물론 내부에서 일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한다면 내 하루하루가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에 쓰이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안고 면접을 봤다. 분명 가을이었는데 하와이안셔츠를 입은 인아스가 반갑게 맞이해주신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면접이 끝날 무렵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이 있냐고 하시기에 하나 여쭈었다.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일하는 과정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는데, 오늘의풍경이 말하는 새로운 디자인은 뭐예요?”

그러자 인아스는 눈을 아주 빛내며 한참을 대답해주셨다. “...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디자인한다거나….” 당시에는 사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의미가 바로 와닿진 않았다. ‘새롭긴 한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시각 디자인, 시각이 전부가 아니다

2024년 10월부터 오풍의 인턴으로서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디자인하기’가 뭔지, 기존의 ‘디자인하기’와 어떻게 다른 건지 조금씩 실감하게 됐다. 가장 처음으로 ‘다르게 디자인한다’고 느낀 순간은 하인리히 뵐 재단의 SAGA 프로젝트 브랜딩 작업을 하면서였다. 하인리히 뵐 재단은 독일 녹색당 기반 글로벌 정치 재단이다. SAGA는 Small Achievements for Greener Asia의 약자로, 동아시아의 기후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모여 서로의 활동을 나누며 성취를 축하해주고 인사이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취지에서 하인리히 뵐 재단이 기획한 네트워킹 행사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 막 참여하게 된 당시는 클라이언트와 함께한 키워드 워크숍 결과를 분석해 브랜딩 방향성을 잡고 그에 맞춰 사용할 서체를 찾는 단계였다. 어떤 서체를 써야 그 도출한 브랜드 키워드의 이미지, 인상과 딱 잘 어울릴까? 시각적인 측면에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이 프로젝트는 동아시아 활동가 네트워크 브랜딩이니까 동양인 비남성 디자이너 서체 아카이브 혹은 여성이 만든 오픈소스 서체 아카이브에서 서체를 골라보면 좋겠다”라는 디렉션을 받았다. 나는 사실... 멋지고 힙하다며 유행하는 서구권 폰트 파운더리는 많이 알면서도 그런 아카이브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아차 싶었다. 

그 결과 어센틱 산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어센틱 산스는 한국/중국/일본 시스템 글꼴에 포함된 라틴 문자가 한국어/중국어/일본어에 맞춰지다 보니 찌그러지거나 가늘어지는 형태적 특성을 탐구해 만든 서체다. 유럽 중심적인 타이포그래피 품질과 세련미 기준을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아시아 활동가들이 네트워킹하는 데에는 언어의 장벽이 크고 어쩔 수 없이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게 되는 아쉬움이 있는데 서체라도 이런 걸 쓰니 좀 위로가 됐달까. 그리고 오픈소스 서체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활동가들이 SAGA를 통해 서로 자원이 되어준다는 프로젝트 취지에도 잘 맞았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프로젝트의 맥락과 서체가 만들어진 배경을 고려해서 서체를 고를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러니까 더 의미 있고 멋진 디자인이 되는구나.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느꼈다.

“페미니스트 디자인은 단지 페미니즘을 주제로 다루는 디자인을 말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디자인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이 ‘하는 것’에는 디자인의 전 과정과 그 주변을 다시 설계하는 일까지 포괄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디자인은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단,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브레이크 댄스처럼.”
2024.06.01. 사월의눈 <페미니스트? 디자인? 브레이크댄스?> 신인아

협업은 착취가 아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협업자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함께, 기존에 국제앰네스티에서 영어로 만든 유스(청소년) 활동가들의 웰빙을 위한 책자를 번역해 한국판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때였다. 내용도 일부 한국 상황에 맞추어 바꾸고 디자인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누구나 집에 갖춰놓는 구급상자처럼, 유스활동가라면 하나씩 갖춰두면 좋은 간편하지만 든든한 돌봄 매뉴얼’을 콘셉트로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매뉴얼 같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려주실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하려던 중이었다. 평소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이전 직장에서 일러스트 작가님을 섭외하고 협업했던 경험이 제법 있어서 꽤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금세 꺾였다. 오늘의풍경이 협업자를 찾는 기준이 내가 이전까지 협업자를 찾아왔던 기준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전에 일러스트 협업자를 섭외할 때는 이랬다. 나는 실무자 관점에서 단순히 프로젝트에 적합한 비주얼 스타일을 잘 뽑아내 줄 수 있으면서도 마케팅적으로 도움이 될 법한 유명한 작가라면 모두 리스트업했다. 그리고 결정권자는 그중에서 돈은 많이 안 줘도 되는데 해달라는 대로 잘 해줄 것 같은 작가를 선호했다. 

한편, 오늘의풍경은 협업자를 찾을 때 여성, 퀴어, 장애인, 지역 창작자, 평소 사회참여에 관심 있는 작업자, 한국적 형태를 탐색하는 작업자를 우선으로 한다. 또다시 아차 싶었다. 앞선 SAGA 프로젝트에서와 같은 마음이었다. 이전까지 어딘가 잘못됐다고는 느꼈지만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지까지는 상상해 보지 않았단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클라이언트와 프로젝트의 배경을 잘 이해하는 협업자들과 일할 수 있었다. 그 과정 또한 달랐다. 이전에 경험한 인하우스 디자이너란 불가능한 일정을 가능하게 하려고 일러스트레이터나 사진가, 인쇄소 등의 협업자들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야근하며 착취당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메신저 채널명은 ‘앰네스티-무리하지마’였다. 활동가와 협업자와 우리 서로가 모두 무리하지 말자는 약속이 담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냈다. 

“협력은 전문가인 내가 시혜적으로 디자인을 하사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디자인을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나는 그가 처한 상황과 맥락을 모른다. 그러니 그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디자인을 엮어 올릴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박봉과 야근’의 신화 속으로 몰아넣지 않는 것이다.”
2025.04.24. 서울시립미술관 세마코랄 <한 명의 디자이너가 해방되려면 온 세계가 필요하다> 신인아

학교에서도 지난 직장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디자인 태도로 일하는 오늘의풍경

지금 생각해 보면 서체도 일러스트도 그 창작자의 배경까지 고려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왜 이전까지는 그걸 고려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학교에서도 이전 직장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배우지 못했을까? 왜 서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며, 누군가를 미워하고 탓하며 일해야만 했을까?

그래서 나는 인턴을 마치고, 다음 인턴 채용 공고를 낼 때 오늘의풍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학교에서도 지난 직장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디자인 태도로 일하는 오늘의풍경’이라고. “그래서 그게 뭔데?”라고 묻는다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질문을 던지고 서로를 돌보며 협력적으로 디자인하기’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이건,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내가 오풍에서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오풍이 그간 “상호 돌봄의 디자인 협업 모델”을 만들며 구체적인 실천을 이어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일방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무리’를 하지 않기 위해 ‘함께 합의한 무리’를 해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프로젝트 시작 전에 파트너와 지난 협업 과정을 회고하고, 각자 평소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구조를 공유하고, 서로 염려되는 점을 나누고, 그라운드 룰을 만들고, 매니징 업무를 분담하고, 온라인 협업 툴을 함께 정했다. 예산에 대해서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서로 물어가며 3개월이 지난 지금 각 프로젝트들은 당연하게도 서로 다른 리듬과 방향으로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2022.06.14.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려고 해요> 백희원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떠올려보자. 내 경험이 약간의 힌트가 되길 바란다. 어렵게 느껴진다면 댓글로 함께 대화를 나눠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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