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롱김치찌개 디자인 팀플하기
지난 몇 년간 디자인은.... 협업이다!!! 라고 누차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래도... 나도 안다. 협업은... 정말로 힘들다. 1인스튜디오로 오늘의풍경을 운영하다가 하나둘 동료를 맞이하고 팀으로, 회사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더 절절히 느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HR자료를 읽고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묻는 해맑은 나에게 온갖 기상천외한 HR이슈를 말하며 내 이상을 깨부수던 언니들의 얼굴을 종종 생각한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소통은 기하급수적으로 고난도의 일로 변한다. 쪼랩인 나에게 협업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는 늘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배경, 그리고 그것이 협업에 참여한 개개인이 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역학은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가늠하고 대처할만한 규모의 것도 아니다. 그 소통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마음이 맞거나 같은 목표를 두고 협업할 수 있는 동료들과 소규모로 일하는 것을 나는 막연히 이상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늘 생각보다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 세계인의 팀플'이라 불리는 기후위기 대응은 어떠한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렇다고 포기할 일인가? 맘 편히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그런데 농담 같은 이 전 세계인의 팀플은 현재진행 중이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1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줄여서 COP)가 열렸고, 2025년 30번째 COP는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다. 한국도 참가국이다.
이번 COP30에 대응하여 책자를 만들고 싶다고 오늘의풍경을 찾아준 하인리히 뵐 재단 동아시아 사무소 노건우 활동가는 COP24를 참관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곳엔 누가 가는 걸까? 갔다 오면 뭘 알게 될까? 궁금한 게 많아 프로젝트 초반에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그때 건우 님의 대답은 꽤 뻔하면서도 의외였다. 그는 '무력감'을 가장 크게 느꼈다고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건 활동가나 정부 관계자도 있지만, 기업 관계자나 학생도 많다고 했다. 한국도 참가하지만, 일본이나 다른 국가에 비하면 적은 수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에서 350여 명이 참석한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한다고 꼭 이 행사의 맥락과 논의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이들이 브라질로 이동하는 긴 비행시간 동안 읽을 수 있는 한/일 이중언어로 된 기내지 콘셉트의 책자였던 것이다. 제목도 이미 정해져있었다. "Don't Panic" 게으른 희망도 섣부른 절망도 말고 침착하게 바라보자는 뜻으로 COP24 참석 이후로 무력감이 컸던 과거의 건우 님 자신에게 건내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잡지는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발행한 브라질 아마존 백서 내용을 큰 기둥으로 하고, 여기에 한/일 활동가와 전문가의 칼럼을 더하여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이는 건우 님이 제안한 '기내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보는', '심심풀이와 같은 가볍고 재밌는 진같은 잡지'와는 매우 상반되는 계획이었다. 괜찮다. 그 부분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는게 오늘의풍경의 몫이니까. 오늘의풍경에서는 백서 내용을 살피고, 이를 어떻게 보여줄지 황효진 에디터, 김영인 디자이너 그리고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시작했다.
전략 1. 마카롱김치찌개 팀플을 하자!
브라질 아마존 백서는... 백서답게 매우 빽빽하다. 그 안의 내용은 중요한 단서와 배경을 많이 제공하지만, 그걸 가벼운 마음으로 다 읽긴 어렵다. 아무리 비행시간이 30시간이어도 말이다. 우리는 백서의 핵심 내용을 '현황'과 '저항'으로 나누고, 여기서 내용을 선정해 글이 아니라 비주얼로 보여주자고 했다. 잡지의 광고 지면처럼 말이다. 스타일은 다양할수록 좋았다. 창작자의 성격도 다 달랐으면 했다. 전 세계 팀플은 정말 다양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는 팀플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의풍경에서는 늘 그렇듯, 활동에 참여하는 창작자와 협업을 하기를 희망하며 협업자를 리스트업했고, 그중 녹록지 않은 일정임에도 기꺼이 함께해준 11팀의 창작자/팀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글로 들어갈 내용을 이미지로 바꾸는 식으로 내용을 줄이고 줄였으나, 여전히 많은 내용을 기꺼이 한-일, 일-한 번역을 진행해 준 건 사회학과 기후위기 연구를 진행해 본 경험이 있는 김기성 연구자였다. 자, 우리는 이렇게 팀을 세팅했...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제 협업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은 기성 님이 일본어 검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원어민은 아니다 보니 말이다. 나는 지난 1월 일본 여행 때 만난 일본 디자이너 소우다 사키 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고, 그렇게 일본에서 한국어 번역자로 활동하는 하라다 사토미 님을 알게 되었고, 사토미 님 역시 기꺼이 합류해 주셨다. 사토미 님은 예상보다 분량이 훨씬 더 많았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편집자이자 교정자인 야기누마 유타 님을 섭외해 함께 작업해 주셨다. ... 우리도 질 수 없지... 는 아니고 원래도 교정교열 보려고한국어는 글항아리에서 편집자로 10여 년간 인문사회계열 책을 기획 편집한 박은아 편집자가 살펴봐 주었다. 이제 정말 끝이겠지?
아니, 그런데 말입니다... 브라질 현지 소개 파트에 무수한 브라질 포르투갈어가 한국어/일본어로 병기되어 나가야 했다. 이 부분의 한국어 파트는 브라질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백리브가 님이 혜성처럼 등장해 도와주셨다.(나는 어떻게 섭외했는지 모른다는 뜻) 그렇게 이 잡지엔 한국, 브라질, 일본의 활동가, 연구자 편집자, 번역가, 디자이너,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 예술가, 미디어 아티스트, 콜렉티브 총 31명이 함께 하게 되었다.
큰일이었다.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데, 고작 350권 만들어 배포하면 조금 김이 빠지지 않나? 그렇다면? 오늘의풍경이 9월에 런칭한 비영리단체 슈퍼스톰이 있다. '더 널리 이 프로젝트를 알릴' 겸, '한국번역원 단가표를 보고 사색이 된 우리와 기성님, 받아보니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은아님, 갑자기 유타 님을 부른 사토미님... 그리고 빠듯한 일정에 작업을 보내준 모든 창작자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얹어 드려야겠다!!!'는 겸사겸사로 슈퍼스톰도 합류하여 펀딩 프로젝트도 돌리게 되었다.
야심차게 열었지만 기후위기 대응만큼 성공이 요원해보이는 우리의 펀딩 페이지
자, 이제 펀딩 관련해서 또 그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 하하하!!! 그걸... 우리가 해냈네? 완벽했다고 할 순 없지만 말이다. 해... 봤네?로 글을 고치겠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기후위기 팀플과 비슷한 모습 아니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마카롱김치찌개 협업을 더 잘할 수 있을까? 늘 디자인 프로젝트는 이런 측면에서 고난도 퍼즐처럼 느껴진다.
전략 2. 비틀자!
광고가 백서 내용을 담은 비주얼이듯, 우리는 기존 문법을 비틀어 흥미를 자아내고자 했다. 이는 COP가 열리는 벨렝을 소개하는 파트에 많이 쓰였는데, 예를 들어 관광가이드에 많이 등장하는 '생존 ㅇㅇ어!' 부분에 은근슬쩍 "지금 당장 정의로운 전환을!", "미래는 조상에게서 온다", "개미 하나 못 당하면 개미집을 건드리지 마라!"와 같이 거리에서 뜬금없이 외치면 좋을 현지 기후 행동 구호를 넣는다거나, 기내지에 있는 스트레칭 가이드에서 참고하여 '패닉에 도움이 되는 눈 운동' 파트를 만들기도 했다. 심심풀이의 대명사, 십자말풀이도 당연히! 포함되었으나 인제, 내용을 잘 읽었다면 풀 수 있는 COP30상식 퀴즈를 곁들인... 그리고 필자 프로필은 필자가 좋아하는 동물 이미지로 대체했다. 이런식으로 구석구석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개념 면에서 비튼 것도 있다. 제목 "Don't Panic"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차용한 것인데, 개념적으로는 적합하지만 딱히 원전과의 관계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잡지를 통해 기후위기 해결법이나 대처법 가이드를 담은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건, 기후행동은 계속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희망'과 '절망'사이 밸런스를 잡는 것의 중요하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표지를 겉표지와 속표지로 나누어 2중으로 제작했다.
겉표지에는 1978년 더글라스 애덤스가 들고 찍은 "Don't Panic" 책처럼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한국어와 일본어 제목을 담백하게 넣었다. 똑같이 두껍고 폭이 좁은 산세리프체라더라도 라틴과 한글, 일본어 모두 다른 인상을 준다고 생각했기에 한글과 일본어 서체는 타자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골라 딱딱하고 공식적인 인상을 주려고 했다.


겉표지에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침착하게 다음을 도모하는 태도가 담겼다면,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속표지에서는 반전을 주었다. 안 좋은 일로 피드가 도배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피드 '정화'를 위해 공유하는 귀여운 동물 이미지나 위안을 얻기 위해 만지는 푹신하고 털 달린 인형 이미지를 배치했다. 배경은 애니메이션 "세일러문" 변신 장면의 배경이미지나, 미셸 공드리의 영화 "수면의 과학"을 떠올리며 환상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오버해서 작업했다.

동물 사진을 찾아보고, 인형을 만지는 행위를 회피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엔 취약성에 대한 인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조금만 틀면 바로 거기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사실, '침착할 것'이라는 말이 불가능한 지시라는 것을 함께 인정하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후위기 같은 거대한 문제 앞에 침착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인정한 순간, 침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잡지를 받아 들 독자들이 겉표지에 마음을 가다듬었다가 펼치자마자 피식 웃으며 마음을 좀 놓길 바라기도 했다. 잡지 안의 내용은 어렵기도, 무겁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걸 감당할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좀 어깨에 힘을 빼고 시작하는 게 좋다.
하다보니 알게된 것들...
앞서 소개한 커다란 두 방향성을 가지고 디자인 작업의 세부 디테일을 잡아갔다. 잡지에는 자잘자잘한 이미지가 많이 필요한데, 이미지 예산은 창작자 섭외비로 모두 탕진했으므로, 나머지는 퍼블릭 도메인이나 영리 혹은 비영리 배포가 가능한 이미지를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몇몇 흥미로운 소스들이 있어 이렇게 글을 읽는 여러분을 위해 소개해보고자한다.

미디어닌자: 미디어닌자(Mídia NINJA)는 브라질의 독립 언론이다. 브라질의 주류 미디어는 몇몇 재벌이 소유한 것으로 시민운동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부분에 문제의식을 느껴 시작한 곳을 알고 있다. 이곳의 사진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4.0 CC-BY-NC 라이선스에 따라 제공되며, 상업 용도가 아니라면 크레딧을 기재하고 활용할 수 있다. 사진의 퀄리티가 매우 좋고, 카테고리도 '기후정의', '주거권 운동', 'LGBTQIAP+', '페미니즘' 등으로 분류되어 있어 활용하기도 좋았다.
Death to Stock: 고퀄리티 이미지를 제공하는 스톡사이트. 무료는 아니지만, 스톡사이트에서 이미지 찾는 데 지쳤다면 꽤 쓸만한 곳이다. 주로 뷰티나 패션쪽 이미지가 많아서 이번 프로젝트에 활용하기 엄청 좋지는 않았지만! 아주 다른 접근으로는, Disimages라는 사이트도 있다. 여긴 스톡 미감을 활용해서 이상한 사진을 많이 만든다.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이미지를 찾기 좋다! 이번 작업에 Unsplash와 함께 엄청 큰 도움...
마무리하며...

이번 프로젝트는 날 옛 추억에 잠기게 했다... 10여 년 전 처음으로 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을 때, 내가 주로 투입되었던 프로젝트는 대기업의 사보작업이었다. 그때 달마다 좆뺑이친 경험 덕분에 이번에 프로젝트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건 비영리 재단의 프로젝트이라는 점. 이 결과물의 PDF버전은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하인리히 뵐 재단 동아시아 사무소가 배포할 테니까... 사실 사보도 무료로 볼 수 있지만... 이건 회사를 홍보하는게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팀플에 기여하고자 만든 것이다. COP로 향하는 이들 외에도 COP라는 말이 이 잡지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진다면 전 지구적 팀플에 꽤 큰 힘이 될거다.
그런데 그때와 또 다른 지점이 있다면, 이번에 예산이 그때보다 적다는 것.... 그러나 괜찮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중에... 바로 당신이 이 마카롱김치찌개 팀플에 합류하여.... 도와주면 되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면.... PDF가 무료라고 나와 여기 참여한 모두의 노동력과 시간까지 무료로 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왜냐면... 그럼 저는 뭐 먹고 살아요? 그래서 펀딩을 시작한 것도 있다. 나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그저 의미 있는 디자인 프로젝트 하나 재밌게 했다!가 아니다. '좋은 일'에 참여한 모두가 '좋은 뜻'뿐만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받고, 그래서 맛있는거 사먹고 좋은 거 본 담에 또 이런 프로젝트에 함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을까? 실험해 보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취지에 공감한다면 후원해 주면 좋겠다. 후원자에게는 실물 책자가 전달되기도 하고, COP30에 다녀온 사람들이 참석하는 모임에도 참여할 수도 있다. 혹은 그게 어렵거나 필요 없다면, 주변에 프로젝트를 입소문 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 내 힘이 작아보이더라도, 모든 일은 그 작은 힘들이 모여 이뤄지니까. 아니면 펀딩 페이지 소개 글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 거기에도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렇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마카롱 김치찌개 팀플의 팀원이 되어주면 좋겠다.
관심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이 세다. 그러므로 많관부라는 말을 남기며... 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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