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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다운 동물의 이미지를 찾아서

이 글은 동물권 행동 카라의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 "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의 디자인 작업기입니다.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디자인을 위해 많은 분들과 협업하며 제 인식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귀여운 동물 이미지를 보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경험이 있거나, 동물이 등장하는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면 이 가이드라인의 일독을 권합니다. (다운로드하기 https://www.ekara.org/report/ekara/read/13679 )

마크니와 나

나의 반려고양이 마크니가 우리 집에 입양 온 결정적인 계기는 주둥이에 있는 태극무늬였다. 음과 양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룬 이 멋진 무늬 때문에 평소엔 관심도 없던 턱시도 고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원래는 '디자이너의 집에 어울리는 고양이'인 카오스나 벵갈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마크니를 임시보호처에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실망감을 감추느라 애써야만 했는데 실제로 본 마크니는 정말 못생겼었기 때문이다. 마침 마크니 옆 자리의 좀 더 귀여운 고양이가 연신 냐옹 거리며 내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마크니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마크니는 당시 2살, 내가 데려간다면 앞으로 10년은 족히 더 나와 함께 살 친구였다. 그래서 내 맘에 꼭 드는 고양이를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털평’을 하며 인테리어 소품처럼 고양이를 고르는 건 구린 일이라는 걸. 그때 나는 ‘구린 말을 어떻게 안 구리게 하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답을 찾지 못했고 구린 말도 할 수 없었던 덕분에 다행히도(!) 나는 마크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 순간인데 관심이 있기는 한 건지, 마크니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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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니(11세 추정)

마크니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다. 우리를 만나게 해 준 마크니 주둥이의 태극무늬도 멋지지만, 반양말을 신은 발도, 나에게 들이미는 엉덩이도, 쓰다듬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귀도, 감으면 없어지는 눈도, 작은 콧구멍도, 누운 포즈도, 앉은 포즈도, 선 포즈도, 걷는 포즈도, 뛰는 포즈도 다 귀엽고 멋지고 사랑스럽다(이 세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리고 엄청 수다쟁이인데, 감정표현이 확실하고 바라는 바도 정확히 전달할 줄 아는 천재다. (진짜 내가 집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마크니의 털은 유독 비단결 같이 곱고 포근하다. 얼마 전에는 사진 정리를 하다가 집에 막 왔을 무렵의 마크니의 사진을 오랜만에 보았다. 마크니의 모습은 9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내 시선이었다.

마크니와 함께 하며 타임라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가는 동물 사진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힐링짤’로 자주 등장하는 몇 유명한 동물 계정은 보는 게 불편해서 타임라인에 뜨지 않도록 뮤트 시켜 두기도 했다. 왜 누구나 좋아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걸까? 동물권 행동 카라의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 책자 “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를 디자인하며 그 이유를 배울 수 있었다.

미디어 속 동물들은 자주 해를 입습니다

사단법인 동물권 행동 카라(KARA, Korea Animal Rights Advocates)는 동물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동물들의 복지와 권리를 대변하는 다양한 현장 및 정책 활동들을 해온 비영리단체다. 2020년 카라는 미디어 산업에서의 동물권 현황을 조사했다. 먼저 미디어에 등장하는 동물의 모습, 미디어를 만들어가는 현장에서의 동물권, 그리고 동물이 등장하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인식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내게 온 의뢰는 이 연구의 보고서 격이 될 책자였다. 카라는 누구나 접근하기 쉽도록, 너무 딱딱한 연구보고서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것은 완벽히 보고서용으로 만들어진 원고와 조사 결과 데이터들이었다.

보고서 내용은 꼭 알려져야 할 중요한 현실을 담고 있었다. 제작현장에서 동물들은 낯선 환경에서 장시간 기다리며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고, 촬영을 위해 구매되거나 포획된 동물인 경우 촬영이 끝나고 버려지기도 했다. 모니터링단을 꾸려 유튜브 영상을 모니터링한 결과에서는 '고양이를 못 자게 해 보는 영상', '미로에 갇힌 강아지' 등 동물학대가 우려되는 정황이 다수 확인되었고 동물을 신기한 오락의 대상이나 희귀한 소품, 살아있는 먹거리로 취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댓글은 8%에 불과했다. 유튜브는 조회수, 좋아요 수가 바로바로 반영되는 플랫폼이다. 결국 소비자인 시청자/관객이 이런 영상들을 즐기기만 한다면 동물 학대 영상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로 증명하듯 시민 대상 인식 설문조사에서는 83%가 반려동물 관련 영상을 시청했고, 가장 큰 이유는 귀여워서(46%)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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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실린 미디어 제작 환경에서의 동물권에 대한 설문 응답 내용(동물권 행동 카라, 2020)

카라의 요구대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했다. 글과 숫자 중심의 내용이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동물 이미지를 시각 요소로 활용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이는 곧 '동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는 곧 지금까지의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난 새로운 동물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문제는 그에 시간이 든다는 점이었다. 이 시간의 단위는 (흔히 디자인이나 창작에 주어지는) 며칠, 몇 개월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관점을 길러야 하고, 요구해야 하며, 실험하고 토론해야 하는 일이며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내게는 1.5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동물권 행동 카라는 2002년부터 이런 일의 기반을 만들어왔으니,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망한동물사진대회에서 착안한 #망안한사진대회

‘대상화되지 않은 동물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막막했다. 나 역시 그런 미디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한 번 더 바꿨다. 내가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었던 동물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자. 다양한 짤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다가 ‘망한동물사진대회’가 생각났다. 반려인들이 반려동물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포착하는데 실패한 사진들이 올라오는데, 나도 마크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아보려다 흔적만 찍는다거나 외계 생명체 같은 사진을 찍는 정도로 실패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깔깔 웃으며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카메라 앞에 얌전히 앉아 귀여운 포즈를 취하는 걸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실패작들이 나오는 게 자연스러우며, 그게 대상화되지 않은 모습이지 않을까? 이런 모습을 표지에서 보여주고, '이런 이미지가 자연스러운 것인데 연출된 촬영을 해야 한다면 읽어보세요'라는 느낌으로 책자 디자인을 전개하면 어떨까? 대상화되지 않은 동물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사회적 변화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동물 이미지에 대한 관점을 잠깐이나마 바꿔볼 계기 정도는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이를 통해 참여자들이 나 역시 미디어 소비자일 뿐 아니라 1인 미디어 생산자라는 점을 상기하게 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랬듯, 참여자들도 재미있게, 반려동물들도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즐겁다면 많이 참여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뒤에 망한사진 동물대회를 응용한 온라인 캠페인을 제안했다. 보고서에 활용할 수 있는 이미지를 모집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이를 통해 ‘망했’다고 생각한 이미지가 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함께 이야기하는 일시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참여를 이루어내려면 이 목표를 쉽고 빠르게 전달할 해시태그 및 캠페인 카피라이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비영리단체와 일한 경험이 풍부하고 동물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브랜딩 전문가 한지인 님께 급히 연락을 드렸다. 지인 님은 캠페인 카피라이팅과 더불어 보고서 제목 윤문도 함께 작업해주셨다. 보고서 디자인을 요청했는데 캠페인을 역제안받았으니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일이 늘어나 귀찮을 법도 한데 카라에서도 적극 협조해 주셨다. 덕분에 ‘망안한사진대회’라는 멋진 이름의 캠페인(https://www.instagram.com/explore/tags/망안한사진대회/)이 열렸다. 비록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 남짓 진행된 캠페인이긴 했지만, 200여 장의 망안한 사진을 수집할 수 있었고 이 사진들은 보고서의 표지와 내지 장 표지에 사용되었다.

인간동물이 읽기 편한 망안한 디자인

동물권 활동가들은 '인간'을 '인간동물'로, '동물'을 '비인간동물'로 지칭하는 표현을 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종(種) 평등한 동물로서의 우리를 기본값으로 두기 위한 실천이다. 가이드라인 디자인에서는 무엇을 기본값으로 삼아야 할까? 나는 ‘망안한사진’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전개했다. 그러니까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망안한 사진처럼 망안한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 도출된 키워드들은 '의도치 않은', '우연성', '재미있는'이었다. (별 수 없이 작업 과정에서는 망안한 동물의 모습에 대한 인간적 반응으로 컨셉을 잡았다.) 마크니는 툭하면 내가 읽어야 하는 자료나 키보드를 방석으로 애용하곤 하는데, 그 모습이 힌트가 되었다. 나는 지면의 내용과 개연성이 없는 낙서된 선과 고양이가 키보드 위를 지나가며 타이핑된 듯한 오타를 디자인 컨셉을 보여주는 시각요소로 활용했다.

디자인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색은 친근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밝고 부드러운 색과 이와 동떨어진 애매한 색을 조합해서 친근감을 주면서도 마냥 익숙하고 귀여운 느낌이 들지는 않게 했다. 편집 디자인의 기본을 잡는 본문 서체는 직지고딕과 Peggs를 섞어 짰다. 직지고딕은 현대적 느낌을 내는 고딕체로 ㅅ,ㅆ,ㅈ,ㅉ,ㅊ의 비대칭 형태가 캐주얼하고 낯선 느낌을 주며 Peggs는 둥그런 마감의 획이 특징인 타자기 서체에서 영감을 받은 서체로, 타자기에서 나타나는 의도치 않은 오류를 살려 디자인에 반영한 서체라 더더욱 이번 디자인에 찰떡이었다. 설문 통계를 보여주는 그래프가 많은 책의 특성상 숫자 서체를 무엇으로 쓰는지에 따라 인상이 크게 좌우되는데 Peggs가 조금 딱딱할 수 있는 직지고딕을 보완하는 동시에 그 인상을 잘 잡아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책의 판형은 일부러 넉넉히 잡았다. 워크북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페이지 네이션을 짤 때는 최대한 한 페이지 당 정보 값을 줄여 빠르게 다음장으로 넘길 수 있게 해 무거운 내용이지만 쉽게 읽히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책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설문조사 결과 페이지는 단순한 그래픽과 말풍선을 사용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읽는 듯한 스토리북 같은 전개를 의도했다. 제목만 간단히 훑고 지나가도 핵심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프는 단순한 형태로 크게 배치하여 정보가 쉽게 한눈에 들어오게 했고, 같은 맥락에서 본문에 들어가는 수치도 그림처럼 처리해 본문이 지루하지 않게 보이게 하고 시선을 끌도록 짰다. 동물별 주의사항이나 체크리스트는 현장에서 바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판단하여 책에서 잘라내어 활용할 수 있도록 되도록 한 페이지 안에 다 들어올 수 있게 디자인하고 잘라서 사용할 때를 고려해 뒷면을 비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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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결과의 의미가 한 번에 드러나는 제목, 그래프, 말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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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수치도 이미지처럼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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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취해 사용 가능하게 디자인된 체크리스트

표지에는 다양한 프레임으로 구멍을 내어 책 1쪽에 있는 동물 이미지들이 담기도록 했다. 이는 동물이 담기는 다양한 촬영 현장을 은유하는 장치였다. 또한 낙서 같은 선을 넣어 '인간이 바라는 대로'의 현장과 이미지는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내지, 표지는 모두 친환경 재생지를 사용했고, 콩기름 인쇄를 했으며 풀을 사용하지 않고 실을 사용하는 미싱중철제본으로 환경에도 되도록 해를 입히지 않는 인쇄 제작물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후가공에도 필름을 사용하는 코팅이나 박을 하지 않았다. 책이 무사히 제작되어 카라에 도착했을 때 카라의 킁킁 도서관 고양이 사서인 알식이 검수를 해 줬는데, 친환경으로 제작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표지의 구멍이 알식의 장난감이 될 수 있다면... 그 점은 의도치는 않았는데 뿌듯했으므로 재밌게도 '의도치 않은' 디자인의 최고봉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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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은' 디자인이 빛을 발한 순간! (사진: 카라)

언제나 그렇지만 이렇게 돌아보니 보고서 책자 하나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카라의 활동가들과 시민 모니터링단과 2,055명의 설문 참여자들과, 망안한사진대회의 캠페인 참여자들과... 아, 다시 써야겠다. 보고서 책자 하나가 정말 많은 동물들의 참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동물들에게 전달되어 미디어에서 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크니에게도 큰 감사인사를 남겨야겠다.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나와 함께 살아줌으로써 ‘털평’이나 하던 인간이었던 나를 조금이나마 어엿한 동물답게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디자이너 동물의 임무에 도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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